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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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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27. 09:3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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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굳게 닫혔던 문을 연 것 같습니다.
모처럼 비가 내립니다.
창가에 서서 비에 젖어가는 도시를 바라봅니다.
세상 만물이 온통 푸르게 화장을 해나갑니다.
빨간 우산을 쓴 아가씨가 버스정류장 앞의 빨간 우체통으로 다가갑니다.
발목에 납덩이라도 단 듯 걸음이 무겁습니다.
하지만 우체통과 여자는 금세 마주서고 맙니다.
아가씨가 어깨에 멘 작은 가방을 열더니 천천히 하얀 봉투를 꺼냅니다.
애인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편지라도 쓴 걸까요.
마지막 결심이 서지 않는 듯 자꾸 주춤거립니다.
우체통이 재촉하듯 입을 벌리고 기다립니다.
아가씨가 입술을 한번 깨물더니, 편지를 툭하고 떨어트립니다.
그리고는 탁탁탁~ 발자국 소리를 남기며 빗속을 달려갑니다.
빨간 우산 하나가 거리를 두둥실 떠갑니다.
빨간 우체통은 오랜만에 편지 하나를 가슴에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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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통이란 단어는 늘 설렘이라는 단어를 품고 있었습니다.
휴대전화도 이메일도 없던 시절, 젊은이들에게 편지는 거의 유일한 소통의 수단이었습니다.
이름 모를 소녀에게…, 사랑하는 그대에게…, 숙아! 네가 없는 세상은….
온갖 언어를 캐내 밤새 편지지에 심은 뒤, 봉투에 넣고 풀칠하고 우표를 붙이는 내내 가슴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하지만 우체통 앞에 서면 누구나 한번쯤 망설이기 마련입니다.
문구 하나가 가시처럼 목에 걸려서, 밤새 뜨겁게 몸을 달구던 열정이 모두 부질없는 것 같아서….
끝내 우체통에 편지를 넣지 못하고 돌아서기도 합니다.
편지를 보낸 뒤에는 다시 세상이 환희로 가득 차기 시작하지요.
답장을 기다릴 때의 행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안절부절 하다가 집배원 자전거가 오는 기색이면 후닥닥 달려 나가고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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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펜팔이란 게 유행한 적도 있었습니다.
대중잡지에는 펜팔코너가 있기 마련이었고, 그곳에 주소와 이름이 올라가면 전국 각지에서 편지가 쏟아졌습니다.
특히 여자 이름에게로 쏟아지는 편지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정도가 지나쳐 집배원 아저씨의 눈총을 톡톡히 받기도 했지요.
편지를 주고받다 결혼에 골인하는 남녀도 있었으니, 우체통이 중매쟁이 역할까지 한 셈입니다.
편지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국군장병에게 보내는 위문편지였습니다.
지금이야 위문편지를 쓰는 학생도 그걸 기다리는 군인도 없겠지만, 전에는 학교마다 연례행사처럼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습니다.
‘국군장병 아저씨께… 전선에서 나라를 지켜주시는 아저씨들 덕분에 저희들은 두 발 뻗고…’
한 사람이 쓴 모범답안을 여러 명이 베껴 쓰는 경우도 있었지요.
사실 군인들도 위문편지보다는 함께 따라오는 위문품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입대한지 얼마 안 되는 졸병들이나 몇 장씩 나눠 갖고 읽어보는 게 고작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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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과 사람을 이어주던 편지, 그리고 그 편지들이 잠시 머물다 가던 우체통도 시간 앞엔 무력하기만 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사람들은 손으로 편지 쓰는 걸 잊어버렸습니다.
그 배후에는 휴대전화와 전자우편(E-mail)이 있었습니다.
번호만 누르면 화장실에서도 산꼭대기에서도 심지어 외국에서도 보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 누가 일일이 편지를 쓰고 봉투에 넣어 풀칠하고 우표를 붙여 우체통을 찾아가는 수고를 하려 하겠습니까?
동네마다 서 있거나 벽에 걸렸던 우체통들은 늙은 군인처럼 하나 둘 퇴장을 해야 했습니다.
편지 역시 상업용 DM이나 고지서들의 차지가 되어버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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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아직 곳곳에 남아있는 우체통이 폐품이 된 건 아닙니다.
가끔 담배꽁초나 휴지 같은 걸 넣는 사람도 있는데, 벌 받을 짓을 하는 겁니다.
편지를 가져가기는 하는 걸까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빼고는 하루에  두 번씩(지역에 따라 1회) 수거해간다고 합니다.
아무튼, 우체통이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갈수록 보기 힘들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쓰임새에 비해서 인력과 비용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줄일 수밖에 없답니다.
우체통을 구경하러 박물관에 가는 일이 없기를 빌어야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