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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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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케이프에서 마르딘으로 가는 길에 만난 초원

하산케이프와 작별할 시간이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곳이 있어도 여행자는 늘 등을 보이며 떠나야 한다. 반도 그렇지만 하산케이프 역시 정이 많이 들었다. 무엇보다 인류 문명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이 물에 잠긴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내가 설령 다시 찾아온다 해도 지금 보고 있는 이 풍경이 그대로 기다리고 있을까. 절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마르딘으로 가는 길 옆에는 양탄자 같은 풀들이 보기 좋게 깔려있다. 초원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넓다. 일부러 차를 세우고 풀밭을 걸어본다. 푹신푹신한 감촉이 발에 정겹다. 우리나라는 아직 한겨울일 텐데 여긴 완연한 봄이구나. 게으르게 누워 낮잠이라도 한숨 자고 싶다. 하지만 또 떠나야지.

멀리서 본 마르딘 구시가지 

아득한 메소포타미아 평원

오랜 역사의 도시, 마르딘에서 시작하는 첫 아침. 맨 먼저 구시가지를 찾아가 보기로 한다. 구시가지는 해발 1,000m의 산기슭을 따라 세워진 집단 주택지다. 일부러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빽빽하게 들어선 집들을 바라본다. 엄청나게 큰 산 하나가 통째로 사람들에게 거처를 내줬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맨 꼭대기에는 성채가 우뚝 서 있다. 전형적인 방어형 주거지. 뒤를 돌아보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메소포타미아 평원이 펼쳐져 있다. 아무리 둘러 봐도 그저 초원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청소하는 당나귀

마르딘은 남동부 아나톨리아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 마르딘 주의 주도(州都). 어제 떠나온 하산케이프에서 한참 내려와야 만날 수 있다. 어느 정도 남쪽인가 하면 시리아 국경과 2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아랍족이 많이 살고 있으며 투르크족, 쿠르드족, 아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뒤섞인 복잡한 인적 구성을 보인다. 고대에는 북메소포타미아 지역이었으며 아직도 그 때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이곳은 다양한 종교의 산실로도 유명한데 시리아 정교회의 총본부가 1932년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로 이전하기 전까지 중심역할을 했다. 그밖에도 아르메니아 정교회, 예지디교, 조로아스터교 등 여러 고대종교가 둥지를 틀었던 곳이기도 하다. 마르딘이라는 이름은 시리아어로 성채를 의미하는 메르딘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이곳은 상업도시로도 이름을 날렸다. 지리적으로 볼 때 아나톨리아 고원과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연결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아랍과 페르시아에서 출발한 대상들이 이곳을 거쳐 아나톨리아로 들어섰다. 또 밀이나 참깨, 목화 등이 재배되고 양모가 많이 나면서 면직물과 모직물을 만드는 소규모 공업이 발달했다.

 

구시가지의 건물들

이제 마르딘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볼 차례. 구시가지의 명물은 바로 원형이 잘 보존된 산동네 골목길이다. 하지만 골목길로 들어서기 전에 반가운 풍경부터 만난다. 바로 당나귀 청소원. 당나귀의 양 옆으로 두 개의 나무상자와 마대자루가 매달려 있다. 그곳에는 각종 쓰레기가 가득 들어있다. 아하! 이게 말로만 듣던 청소하는 당나귀구나. 복잡하게 생각할 건 없다. 청소차 대신 생활쓰레기를 나르는 당나귀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르딘 전체를 1960년경에 문화 보호구역으로 지정면서 도시 안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을 금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골목은 가파르고 좁아서 차가 들어갈 수가 없다. ‘압바라라고 부르는 석조 건축물들이 골목과 골목을 미로처럼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청소를 안 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동원된 것이 당나귀다. 40마리의 당나귀가 청소에 동원되는데 이들은 시청에 소속돼 있는 공무원이다.

 

일반 주택들이 마치 성채 같은 위용을 보인다.

당나귀를 따라 골목 탐색에 나선다. 듣던 대로 집들은 요새처럼 높은 담을 쌓았고 골목은 사람 한두 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다. 집들을 이렇게 높고 튼튼하게 지은 것은 적들의 침입에 대비해 도시 전체를 요새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골목도 가능한 한 좁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떤 세력도 영원히 이 도시를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격을 하던 쪽이 방어하는 쪽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는 일도 빈번했을 것이다. 집들은 다른 곳에서 보던 집들과 조금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바로 아랍풍의 건축물들이 많다는 것. 어떤 과정을 거쳤든, 이곳을 누가 차지했든 이제는 그저 이야기로 남아 떠돌아다닐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덕분에 아름답고 튼튼하고 은밀한 골목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

 

이런 골목들이 이어진다.

신이 나서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또 다른 청소원을 만났다. 이 아저씨는 카메라를 보자마자 뭔가 보여주지 못해서 안달이다. 우선 당나귀의 재주를 선보인다. 아저씨가 서! 하면 신통하게도 그 자리에 선다. 물론 가! 한마디가 떨어지면 뚜벅뚜벅 걸어간다. 거참, 말 안 듣는 사람보다 훨씬 낫다. 내가 재미있어하자 아저씨는 신이 나서 계속 서! !를 반복한다. 어휴, 그만 좀 하세요. 당나귀 짜증나겠어요. 아저씨와 당나귀가 골목으로 사라지자마자 행상을 하는 당나귀가 나타난다. 커다란 자루에 각종 채소를 담아서 팔러 다닌다. 자루를 들여다보니 감자, , 시금치 등 온갖 채소가 들어있다. 우리로 치면 트럭행상인 셈이다. 감자 있어요! 시금치가 왔어요!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릴 것 같다.

 

당나귀들의 집

골목의 끝에는 쓰레기 집하장과 당나귀들의 집이 있다. 쓰레기를 부린 당나귀들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다리쉼을 하고 있다. 헌데 건물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일부러 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이런! 역시 오래된 건축물이다. 하긴 서 있는 모든 것들이 고대두 글자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으니 당나귀우리 아니라 무엇으론들 못 쓰랴.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말뚝 박고 철조망까지 친 다음 접근금지라는 팻말이라도 걸어놨을 것 같다. 청소원들은 여기서 퇴근한다. 동행한 아저씨 말로는 아침에 나와 열시에 퇴근한 뒤 오후에 다시 나온단다. 전에는 오전만 일했는데 시장이 바뀌는 바람에 오후에 한 번 더 청소를 한다고 한다. 그래도 그리 힘든 일이 아니라서인지 불만이 있는 눈치는 아니다.

 

학생들이라는데...

그 특이한 초대는 과자 하나로부터 시작됐다. 쓰레기 집하장 앞에 학교가 하나 있는데 안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나를 발견한 게 문제였다. 영상카메라가 계속 따라다니니, 아이들 눈에는 동양에서 온 스타쯤으로 보였나보다. 그 중에 한 아이가 과자 하나를 주길래 받아 먹었더니 소리를 지르고 난리다. 그때부터 철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다가 시작된다. 철문은 아이들이 나오지 못하게 잠겨있고 주번으로 보이는 고학년 하나가 지키고 있다. 철문에 매달리는 아이들의 숫자가 자꾸 늘어난다. 어른들과 달리 남녀 간의 구분 같은 것도 없다. 아니 여자 아이들이 더 적극적이다. 이방인에 대한 경계 같은 건 더욱 없다. 하도 아이들이 몰려드니까 결국 주번 아이가 문을 열어준다. 나는 순식간에 쏟아져 나온 아이들에게 무방비로 둘러싸이고 만다. 이런 땐 적진으로 과감히 돌파하는 게 최고다. 학교 구경을 해보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을 것 같아서 안으로 들어간다. 카메라도 신나서 따라오고. 장 선생에게 수업 참관을 할 수 있는지 섭외를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한참 뒤에 허가가 떨어진다. 수업광경이 TV에 나가려면 상급 관청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난색을 표명하던 교장 선생님이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수업 참관

어느 학교인지 밝히지는 말고 찍어주세요

교장선생님의 간곡한 부탁이다. 물론이지요.(편집 과정에서 잘리는 바람에 TV에는 안 나왔다.) 이 나라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합쳐서 8학년제로 운영된다. , 초등 과정 5학년, 중등 과정 3학년을 한 공간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학생 수가 700명인데 학교가 좁아서 오전오후반으로 나눠서 운영한다고 한다. 교장선생님의 안내로 교실로 들어갔다니 환호가 터져 나온다. 아이들은 어디나 똑같기 마련이다.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하고 수업을 지켜본다. 지금은 수학시간. 알리라는 아랍식 이름을 가진 20대 초반의 선생님이 가르친다. 수업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롭고 활발하다. 선생님이 질문하고 아이들이 대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시 골목으로

참관을 마치고 인사를 하는데 또 다시 함성이 터져 나온다. 혹시 나 진짜 스타 아냐? 교장선생님이 교문까지 나와 전송한다. 전혀 예정에 없었던 학교 방문. 즐거운 경험이었다. 어느 곳이나 아이들은 희망이고 미래다. 다시 골목을 따라 내려온다. 골목은 집과 집을 끼고 끝없이 이어진다. 길을 한번 잘못 들면 헤매기 딱 좋을 것 같다. 여기라고 빈부의 차이가 없을까. 어느 집은 고성처럼 웅장한가 하면 판잣집을 간신히 벗어난 모양의 집도 있다. 성 같은 집은 문도 육중한 철문을 달았다. 어느 집에 창문에 ‘KiRALIK’라고 크게 써놨길래 뭐냐고 물으니 세 놓습니다라는 뜻이란다. 이렇게 오래된 집들도 세를 놓는구나. 이런 곳에서 잠시 살아봤으면 좋겠다. 높은 집 위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내려다보고 있길래 인사를 했더니 반갑게 받는다. 하지만 몇 마디 해달라고 카메라를 들이대니 얼른 숨어버린다. 여기 사람들은 카메라 울렁증이 있나보구나. 그러든 말든 골목 탐험을 멈출 수는 없지.

 

 

 

 

*출판사와의 협약에 의해 이호준의 터키기행3 [숨겨진 옛 도시를 걷다] 연재를 여기서 마칩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이달 말 혹은 새달 초에 발간되는 '문명의 고향 티그리스 강을 걷다'를 통해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당분간 쉰 뒤 좀더 재미있는 여행 시리즈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