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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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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14. 13:48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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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에서 자꾸 힘이 빠져나간다. 아이는 허청거리는 걸음을 가까스로 추스른다. 눈이 감길 듯 자꾸 무거워진다. 따뜻한 햇살이 깔린 잔디가 이불처럼 포근해 보인다. 달려가 눕고 싶다. 하지만 볼을 꼬집으면서라도 참아야한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 오르지만 걸음을 재촉한다.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학교에 도착해야한다. 잘못하면 또 놀림감이 될 게 뻔하다. 얼굴은 홍시처럼 붉어졌을 테고 입에서는 단내가 풍길 것이다. 할머니가 술도가에서 술찌게미를 얻어온 다음 날 아침이면 반드시 치러야하는 절차다. 술찌게미는 술을 거르고 난 뒤 남는 곡물찌꺼기를 말한다. 영양분은 없지만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다. 찌게미를 먹으면 술기운이 돌아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숨이 가빠지고 얼굴이 붉어진다. 하지만 굶는 것보다는 찌게미라도 먹는 게 낫다. 학교 근처 술도가 앞을 지나던 아이가 잠시 걸음을 멈춘다. 일꾼들이 자전거에 나무로 만든 술통을 싣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막걸리 배달을 가는 모양이다. 노인 하나가 하얀 쌀로 지은 고두밥을 멍석에 깔고 있다. 술을 만드는 재료다. 아이의 목울대가 꿀꺽, 하고 요동친다. 술찌게미가 아니라 고두밥을 실컷 먹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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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0년대에 술도가, 혹은 양조장은 최고로 잘 나가는 업종이었다. 당시 국민주(酒)였던 막걸리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허가는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점의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가정집에서는 함부로 술을 담글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가장 무서운 것이 술 단속과 땔감으로 쓰는 나무 단속이었다. 제사나 집안 어른의 생일을 앞두고 직접 술을 담그는 것이 오랜 우리네 풍속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집에서 술을 담그는 것이 금지되었다. 식량부족 때문에 나라에서 선택한 고육책이었다. 헌데, 아무리 밑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해도 술이 없으면 판이 성립되지 않는 게 우리 민족 아니던가. 논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새참 때가 되면 막걸리타령이 절로 나왔다. 밥보다는 막걸리가 먼저였다. 풋고추나 쉰 김치 한 점에 막걸리 한 잔 쭉~ 들이켜야 힘이 솟고 온갖 근심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잔칫집이야 일러 무엇하랴. 동네에 잔치가 벌어졌다고 하면 술도가는 분주해졌다. 결혼식이든 초상집이든 다르지 않았다. 부잣집은 아예 우마차로 실어 날랐고 가난한 집도 막걸리 서너 통은 주문해놔야 잔치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학교 운동회는 물론이고 윷놀이 등 놀이판에도 막걸리는 필수였다. 철철 넘치는 잔으로부터 모든 인심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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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술도가로서는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한 때 전국에 2500개가 넘는 술도가가 호황을 누렸다. 젊은 대학생들에게도 막걸리는 인기였다. 현실은 통탄스럽고 미래는 캄캄하던 시절, 그나마 막걸리가 곁에 있어 견딜 만했다. 하지만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이 어디 있으랴. 서민들과 함께 질펀하게 세월을 낚던 막걸리에게도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부터 수요가 줄기 시작하더니 갈수록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농으로 농촌이 비어가고 기계화에 따라 협동농업이 사라짐에 따라 막걸리를 마시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또 막걸리를 대신 할 수 있는 수많은 술과 음료가 쏟아져 나왔다. 독한 시대라, 그에 어울리는 술이 필요했던지 막걸리보다 도수가 훨씬 높은 소주가 국민주의 자리를 차고앉았다. 맥주도 대중주로서 전성기를 노래했다. 막걸리 힘으로 일한다던 말도 옛말이 돼버렸다. 농촌의 새참으로 자장면이 배달되고 막걸리 대신 잘 냉각된 캔맥주가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다방아가씨들이 논둑을 누비며 커피 배달을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술도가의 기둥이 삭아 내리고 지붕에는 풀이 돋았다. 문을 닫는 곳이 속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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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지평리에 있는 '지평막걸리(지평양조장)'를 찾은 건 쇠락의 끝자락에 서 있을 술도가의 모습을 담아두기 위해서였다. 1925년에 문을 연 지평막걸리는 막걸리 하나로 80년 넘게 버텨온 '전설의 술도가'다. 전국 술도가의 70%가 문을 닫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찾아간 날은 햇살이 좋은 초겨울 아침이었다.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큰길에서 조금 들어가니 바로 만날 수 있었다. 80살의 나이를 이고 있는 건물은 주변 풍경과는 조금 이질적으로 보였다. 비바람에 바래버린 2층 집, 그 위의 함석지붕에는 시간의 무게가 그대로 얹혀져 있었다. 그 무게는 곧바로 가슴으로 전이됐다. 반도막만 남아 몽당빗자루처럼 짧아진 버드나무, 창문마다 둔탁하게 덧대놓은 창살, 곳곳에 땜질한 흔적의 시멘트벽, 나무문… 모두가 길고 길었던 세월의 강을 건너느라 입은 상처를 훈장처럼 매달고 있었다.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 보니, 내부는 조용했다. 술을 빚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인 듯 했다. 관리실인 듯한 곳으로 가 두드리니 한 남자가 나온다. 사진을 찍겠다는 부탁에 "작업장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전제를 못박으며 고개를 끄떡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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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만드는 과정을 담을 수 없으니 목적의 반만 이루는 셈이었다. 밖에선 2층으로 보이던 건물이 실상은 1층 짜리 구조였다. 높은 천장에서 아침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와 벽에 그림을 그렸다. 내부 역시 곳곳에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었다. 얼마나 넓은지 한쪽 편에 커다란 우물도 있었다. 지하수를 끌어올려 쓰는 것 같았다.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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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들어가 한쪽 공간을 들여다보니 커다란 독들이 술도가임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또 다른 공간에는 곡물포대가 쌓여있고 술을 만드는데 쓰이는 도구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평막걸리는 아직도 옛날 방식으로 막걸리를 빚는 유일한 술도가라고 한다. 지평막걸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뛰어난 '맛' 덕분이다. 달달한 게 한번 맛들이면 잊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양평 일대뿐 아니라 서울까지 소문이 나 있다. 몇 해 전에는 드라마 '술의 나라'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도가에서 나와 조금 떨어져 있는 판매장으로 가 지평막걸리를 한 병 샀다. 햇빛 잘 드는 빈터에 앉아 막걸리를 조금씩 마시며 소망 하나를 품었다. 이런 양조장들이 오래 오래 살아남아 우리 고유의 맛을 지켜주길…. 그래서 '사라져가는 것들' 품목에서 뺄 수 있기를….


posted by sa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