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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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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25. 08:48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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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거(人力車) 타보신 분들 있나요?
일본, 중국의 관광용 인력거나 인도에서 ‘비인간적 노동’이라 칭하는 릭샤 말고요.
1800년대 말에 이 땅에 들어와서 해방 전에 대부분 자취를 감췄으니까, 직접 타본 사람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인력거.
말 그대로 사람을 태우고 사람이 끌어서 움직이는 1~2인승 수레를 말합니다.
구조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자전거바퀴처럼 생긴 큰 바퀴 2개, 한 두 사람이 앉을만한 공간, 비나 햇볕을 가릴  포장, 붙잡고 끌 수 있는 손잡이….
바퀴는 처음에 철제였다가 점차 통고무 소재로 바뀌었고, 더욱 진화해서 1910년대에는 압축공기를 넣은 타이어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인력거는 일본인들이 서양마차를 본 따 1869년에 처음 만들었다고 하지요.
이 땅에 첫 선을 보인 건 고종 31년(1894년)년이었습니다.
처음 도입될 때는 사람의 힘으로 끈다고 하여 완차(腕車) 또는 만차(挽車)라고 했다지요.
하나야마(花山帳長)란 일본인이 10대를 들여와서 현재 영락교회 부근에 점포를 내고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이 일어나 경인간에 교통량이 폭주하는 바람에 톡톡히 재미를 봤다고 합니다.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 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 안에 (거기도 문 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앞집 마나님을 전차 길까지 모셔다드린 것을 비롯으로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결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쟁이를 동광학교(東光學校)까지 태워다주기로 되었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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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인력거꾼은 전부 일본인들이었습니다.
그것도 기술이라고, 서투른 이 땅 일꾼들이 인력거를 몰다가 손님을 메다꽂기 일쑤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력거는 돈 푼깨나 쥔 사람들의 교통수단으로 서울은 물론 부산·평양·대구 등 지방까지 급속히 보급됐습니다.
이런 토양 속에서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1924년 개벽)이 태어나게 됩니다.
비극의 날을 ‘운수 좋은 날’이라는 제목으로 희화화한, 지금 다시 읽어도 가슴에 아릿한 통증을 만들어내는 그런 소설입니다.
이 땅 유민의 역사나 달동네의 생성 과정에서 보듯이 비참한 배역은 늘 민초의 몫이지요.
바늘 하나 꽂을 땅이 없던 농투성이들이 그나마 소작하던 땅까지 떼이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할 수 있는 일은 뻔했습니다.
지게꾼도 치열한 경쟁이 있어야 한 자리 차고앉을 수 있고, 똥을 푸거나 굴뚝을 뚫는 일이라고 무한정 있는 건 아니었을 테니까요.
그나마 인력거꾼이 산 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도록 해주는 수단 중 하나였을 겁니다.
그래서 운수좋은 날의 ‘김 첨지’가 양산되었겠지요.
우리 근대사의 아픔을 천형처럼 등에 진….

첫째 번에 삼십 전, 둘째 번에 오십 전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김 첨지는 십 전짜리 백통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찰깍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이 팔십 전이라는 돈이 그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목에 모주 한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줄 수 있음이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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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고위관리들이 인력거를 많이 이용했다고 합니다.
또 기차역에서도 인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좁은 골목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점과 인력거꾼들이 지리를 잘 알고 있어서 집을 찾는데 편리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기생들도 단골손님이었다지요.
요릿집에 간 손님이 종업원에게 기생을 지명하게 되면, 즉시 기생조합에 연락되어 인력거를 타고 왔다고 합니다.
도로망이 확충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늘어나는 인력거는 보행자들에게 위험요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땅에 최초의 교통법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1908년(순종 2년) 경무청이 마련한 ‘인력거영업단속규칙’이 바로 그것인데요.
인력거의 영업허가, 인력거꾼의 자질, 운임, 속도, 정원(定員), 서로 길을 비켜주는 규칙 등을 규정했습니다.
또 1914년 7월에는 인력거취체규칙(人力車取締規則)이라는 게 생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각 경찰서에서는 이 규칙에 따라 정한 날짜에 인력거 검사를 실시했는데 대개 인력거의 수선 상태 차부의 복장 단정여부를 검사했습니다.
아무튼 높은 사람들만 탈 수 있던 교자나 가마, 혹은 말이 전부였던 시대에 인력거는 꽤 유용한 교통수단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인력거가 들어온 지 30년 가까이 된 1923년 말 서울에 1816대나 되었다고 합니다.
전국에 4647대가 있었으니 약 37%가 서울에 집중돼 있었던 셈입니다.

그 학생을 태우고 나선 김 첨지의 다리는 이상하게 거뿐하였다. 달음질을 한다느니보다 거의 나는 듯하였다. 바퀴도 어떻게 속히 도는지 끈다느니보다 마치 얼음을 지쳐나가는 ‘스케이트’모양으로 미끄러져가는 듯하였다. 얼은 땅에 비가 내려 미끄럽기도 하였지만. 이윽고 끄는 이의 다리는 무거워졌다. 자기 집 가까이 다다른 까닭이다. 새삼스러운 염려가 그의 가슴을 눌렀다.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이런 말이 잉잉 그의 귀에 울렸다. 그리고 병자의 움쑥 들어간 눈이 원망하는 듯이 자기를 노리는 듯하였다. 그러자 엉엉 하고 우는 개똥이의 곡성을 들은 듯싶다. 딸국딸국 하고 숨 모은 소리도 나는듯싶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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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거를 부르는 방법은 요즘의 콜택시와 비슷해서 타려는 사람이 인력거조합에 전화를 걸면 보내주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대절인 셈이지요.
돈 많고 힘깨나 있는 사람들은 그 시절에도 자가용 인력거를 두었다고 하네요.
물론 부르지 않아도 길거리에서 빈 인력거를 탈 수 있었고, 역 앞이나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는 인력거꾼들이 진을 치기도 했지요.
물론 그곳에도 텃세가 있어 인력거가 있다고 해서 아무나 영업을 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운수좋은 날’을 읽으면서 궁금한 분들도 있었을 겁니다.
인력거를 가졌는데 왜 그렇게 가난한 걸까?
지금의 개인택시쯤으로 생각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영업용 택시가 그렇듯이 대부분은 ‘회사 인력거’였다고 합니다.
즉, 차를 소유한 사람(車主)과 그것을 끄는 인력거꾼(車夫)이 따로 있었던 거지요.
인력거꾼들은 차주의 횡포로 인해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는 형편이니 꾹꾹 참으며 감수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견디다 못해 인력차부조합(人力車夫組合)이란 걸 만들어서 공동투쟁을 펼쳤지만, 예나 지금이나 노동력이 자본력을 이기는 게 어디 그리 쉬웠을라고요.

정거장까지 끌어다주고 그 깜짝 놀란 일 원 오십 전을 정말 제 손에 쥠에, 제 말마따나 십 리나 되는 길을 비를 맞아 가며 질퍽거리고 온 생각은 아니하고, 거저나 얻은 듯이 고마웠다. 졸부나 된 듯이 기뻤다. 제 자식뻘밖에 안 되는 어린 손님에게 몇 번 허리를 굽히며, “안녕히 다녀옵시요.”라고 깍듯이 재우쳤다. 그러나 빈 인력거를 털털거리며 이 우중에 돌아갈 일이 꿈밖이었다. 노동으로 하여 흐른 땀이 식어지자 굶주린 창자에서, 물 흐르는 옷에서 어슬어슬 한기가 솟아나기 비롯하매 일 원 오십 전이란 돈이 얼마나 괜찮고 괴로운 것인 줄 절절히 느끼었다. 정거장을 떠나는 그의 발길은 힘 하나 없었다. 온몸이 옹송그려지며 당장 그 자리에 엎어져 못 일어날 것 같았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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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금은 지금 시세로 정확하게 환산하긴 쉽지 않겠지만, 서울에서 인천을 가는데 쌀 반 가마니 값이 넘었다고 합니다.
1922년에는 승객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인력거요금을 내렸던 모양입니다.
거기에 보면 ‘종래 10리(里)에 80전 하던 것을 60전으로, 하루에 5원 하던 것을 4원으로 인하한다’고 돼 있습니다.
하지만 인력거꾼에게는 워낙 박한 수입인지라 손님과의 요금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인력거시대는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각종 교통수단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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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년에는 임대승용차(택시)라는 게 등장했고, 그밖에도 전차, 버스 등이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한참동안은 인력거와 신문물의 공조가 가능했겠지요.
하지만 영세한 자본과 절대수송량의 빈곤을 이길 방법은 없었을 겁니다.
결국 인력거도, 거기에 기대어 입에 풀칠이나마 하던 인력거꾼도 서서히 도시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1923년에 전국적으로 4647대였던 인력거는 1931년에 2631대로 줄었습니다.
반대로 자동차는 4331대로 늘었고요.
해방 무렵에는 서울에서 구경조차 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기록에는 일부 지방도시에서 6·25전쟁 후에도 인력거조합이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때쯤에는 이미 운송수단으로의 가치는 모두 상실한 다음이었겠지요.

“이년아, 죽었단 말이냐, 왜 말이 없어.”
“….”
“으응, 또 대답이 없네, 정말 죽었나버이.”
이러다가 누운 이의 흰창을 덮은, 위로 치뜬 눈을 알아보자마자,
“이 눈깔! 이 눈깔! 왜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천장만 보느냐, 응.”
하는 말끝엔 목이 메었다. 그러자 산 사람의 눈에서 떨어진 닭의 똥 같은 눈물이 죽은 이의 뻣뻣한 얼굴에 어릉어릉 적시었다. 문득 김 첨지는 미칠 듯이 제 얼굴을 죽은 이의 얼굴에 한데 비비대며 중얼거렸다.
“설렁탕을 사다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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