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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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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7. 21. 13:04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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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이~ 어이~ 못줄을 넘기는 소리가 들판을 달려 나간다. 앞산에서 꾀꼬리 한마리가 긴 울음으로 화답을 한다. 엎드려 모를 심던 사람들이 일제히 허리를 펴고 휘유우~ 한숨을 몰아쉰다. 모두 허리를 펴자 미처 모를 덜 꽂은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손놀림을 재촉한다. 오늘은 광자네 집 논에 모를 심는 날이다. 광자 아버지는 지난겨울 나뭇짐을 지고 산에서 내려오다 넘어지는 바람에, 봄이 돼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광자 엄마가 남정네 못지않게 억척스럽다고는 하지만 아낙네 혼자 농사일을 다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논농사는 자칫하면 때를 놓치기 십상이라 동네사람들이 함께 모를 심어주기로 한 것이다. 모내기는 보통 돌아가면서 품앗이로 해결한다. 품앗이가 일손을 빌리고 그만한 몫으로 갚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각박함을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손이 없어 쩔쩔 매는 집이 있으면 십시일반으로 도와주기 마련이었다. 어둠이 채 흔적을 지우기도 전부터 사람들이 광자네 논으로 모여들었다. 전날 물을 가두고 써레질을 해둔 터라 들어가서 심기만 하면 된다. 몇몇은 못자리 논으로 가 모를 찌고(뽑고) 몇 사람은 지게에 찐 모를 져 나른다. 일을 빨리 진행하기 위해 모를 전날 쪄놓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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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춤(모잡이들이 심기 좋게 모를 서 너 웅큼씩 묶은 단)을 논에 적당히 배분하고 나면 모잡이(모를 심는 사람)들이 논에 길게 늘어선다. 그리고 줄잡이들이 양쪽에 말뚝을 박아 못줄을 치면 모심기 준비는 모두 끝난다. 못줄은 논을 가로지르도록 만든 긴 끈으로 줄모(줄을 맞춰 일정한 간격으로 심는 모)를 심기위한 필수도구이다. 못줄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눈표를 붙이거나 묶어서 표시를 해둔다. 모잡이들은 그 표시에 맞춰 모를 꽂기만 하면 된다. 줄잡이(줄꾼)를 논 양쪽에 별도로 두기도 하지만 보통은 숙달된 농부를 양쪽 끝에 배치하여 모를 심으면서 줄을 넘기는 일을 함께 한다. 못줄의 양쪽 끝에는 말뚝이 달려있어 심을 때는 논 가장자리에 꽂아놓고, 한 줄을 모두 심으면 소리신호와 함께 말뚝을 빼서 높이 든다. 시청각적 효과를 함께 노리는 셈이다. 한 사람이 어허이~ 하며 소리를 내고 다른 쪽이 어이~ 하고 답하면 못줄을 옮긴다. 못줄을 넘기겠다는 신호가 들리면 미처 모를 덜 꽂은 손들이 부리나케 움직인다. 만약 자기가 맡은 영역을 채우지 못하면 기계충 앓은 머리처럼 그 곳만 뚫려버리기 때문에 잠시도 방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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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논밭에서 뼈가 굵어온 농부들은 좀 낫겠지만, 처음 모를 심어보는 사람은 두어 줄 만 심고 나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허리를 구부려야 모를 땅에 꽂을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허리를 펼 수도 없다. 남들과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모심기는 엉망이 된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고통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를 심는다는 건, 이 땅의 백성들이 먹고살 양식을 주는 땅에 깊숙이 머리를 숙여 좋은 소출을 부탁하는 의미도 지녔다 해도 억지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허리 좀 아프다고 도망칠 수야 없는 일. 그렇게 하늘이 주는 햇살과 비, 그리고 땅의 양분과 기운에 농부의 땀방울이 더해야 비로소 쌀 한 톨이 얻어지는 것이다. 정신없이 모를 심다가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면 손가락만한 거머리가 달라붙어 피를 빠는 게 눈에 띄기도 한다. 처음 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난리지만 베테랑 농부들은 툭 떼어 멀리 던져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모를 심다보면 어느 순간 와아! 하고 탄성이 나오기 마련이다. 빈 논은 어느덧 반이나 줄어들고 가슴은 빈 논이 줄어든 만큼의 흐뭇함으로 가득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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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에서 동네사람들이 땀을 흘리고 있는 사이 광자네 집 부엌도 분주하다. 광자엄마는 전날 저녁부터 음식을 준비했다. 품앗이의 미덕은 부엌이라고 다르지 않아 동네 아낙 두엇이 일찌감치 와서 일을 돕는다. 모심는 날은 점심 외에도 새참을 두 번 더 내야 한다. 새벽부터 일을 시작하고 또 중노동을 하기 때문에 아침을 단단히 챙겨먹어도 금세 속이 헛헛하기 마련이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어지는 농번기에는 아이들이라고 그냥 놀지 않는다. 집과 논 사이를 오가며 심부름을 하고 막걸리도 부지런히 사 날라야 한다. 새참 준비가 끝나면 소쿠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논으로 향한다. 나무 그늘 아래 펼쳐놓고 논에 소리를 질러 참이 왔다는 걸 알린다. 그러면 줄잡이의 “먹고 하세”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 일손을 멈추고 밖으로 나온다. 새참은 국수처럼 쉽게 먹을 수 있는 것과 함께 막걸리를 내오기 마련이다. 시장한 판이니 맛이고 뭐고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뚝딱 해치운다. 남정네들은 국수보다는 막걸리에 먼저 눈이 간다. 잔에 가득 따라서 숨도 쉬지 않고 넘긴다. 안주는 밭에서 금방 따온 오이나 고추를 된장에 찍어 우적우적 씹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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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보기 드문 풍경이다. 대부분의 농촌에 이앙기가 보급되었기 때문에 손으로 모를 심는 일이 거의 없다. 깊은 산골이거나, 다른 작물 때문에 아주 늦게 모를 내는 경우 활착이 쉽도록 손모내기를 하는 게 전부다. 어쩌다 ‘농촌체험’이라는 이름으로 도회지 사람들을 모아서 모를 심는 풍경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쇼’일뿐이다. 그들이 가고 나면 뒤치다꺼리가 더 힘들거나 심지어 전부 다시 심어야한다고 한다. 손모내기가 사라진 이유는 농기계 보급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그럴 만한 인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인들끼리 품앗이를 해봐야 할 수 있는 일의 양이란 뻔하다. 그러다보니 농촌풍경이나 인심도 옛날 같지 않다. 이젠 집에서 직접 내오는 새참도 보기 쉽지 않다. 읍내 자장면 집에서 오토바이로 배달하기도 한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풋고추 안주 삼아 캬아~ 소리와 함께 마시던 막걸리도 이젠 맥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실이야 어떻든 간에, 인간이란 지나간 풍경을 조금 과장해서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동네사람들이 길게 늘어서서 어허이! 소리와 함께 모를 내던 장면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은 비어버린 곳간처럼 허전하다.

posted by sagang